본문 바로가기
쓰기/생각

허준이 교수님 졸업식 축사.

by jgo 2022. 9. 8.
서울대학교 Seoul National University youtube

축사 전문 - Mingyu Joo님의 댓글을 정리.

안녕하세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입니다.

우리가 팔십 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생각하면 약 삼만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 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삼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학위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아니면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 십오 년 전 이 자리에 오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은 축하받을 만한 일을 축하받기 위해 이를 무릅쓰고 이곳에 왔습니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 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천 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 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지금여기의 나)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먼 훗날의 나),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않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게되길 바랍니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잘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 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bw om님의 댓글을 정리.

글의 전체적인 내용을 잘 이해하시지 못하는 분들이 계신것 같아서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자면 교수님의 축사는 굉장히 수학적입니다! 제가 수학전공은 아니지만 말씀하셨듯이 수학은 모순이 없는 한 자유로운 표현을 허용합니다. 이것이 축사의 형식과 실질적 메시지에 모두 적용이 됩니다.

축사의 메시지는 '모순이 없는 한 여러분들이 자유롭게 삶을 탐구하며 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라도 좋습니다. 뻔한 이야기 아니냐고 생각하실텐데 이 축사의 독창성과 백미는 그 형식에 있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정의에 따르면 여러분이 자유롭게 살아도 되지만 거기에 모순이 있어선 안되겠죠. 이런 모순들을 압축적으로 제거해 나가기 시작하십니다. 이 모순들이 대개 무비판적으로 퍼진 사회적통념들입니다. 이 축사을 듣고 어떤 분들은 '구체적인 메시지가 없다'고도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라'라고 하면 우연과 의지와 기질의 기막힌 정렬로 대성공한 사람의 자기자랑이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모순이 되므로 제거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말해주면 어떻나? 그것은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하므로 하지 않습니다. 이부분은 수학적으로는 모순은 아닐지언정 아름답지 않은 구조일 겁니다. 그렇다면 졸업식 축사에서 흔히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말고 도전하라...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같은 말들은 어떨까요? 멀쩡해보이는 명제들도 그 전제를 파고들면 모순이나 아름답지 않음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고 그게 수학자들이 맨날 하는 일일겁니다. 일단 그 명제들은 '사회적 유용성'을 전제로 하는 말들입니다. 그리고 그 전제의 전제에는 '제로섬 상대평가'라는 퉁명스러움이 있죠. 소수의 승리자만을 필연적으로 배출하는 시스템이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순의 냄새가 짙게 나죠. 사회적으로 유용한 명제같지만 실상은 소수만이 좋은 명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초점은 '나는 어떻게 살까?'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명제가 나는 '무엇을 할까'가 아님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취업준비, 결혼준비...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할 준비'는 모두 '어떻게 살까' 가 아니라 '무엇을 하면서 살까'의 문제들입니다. 이 '무엇을 하면서 살까'라는 명제에 천착[穿鑿](어떤 원인이나 내용 따위를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하다. - 네이버 사전)하면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들은 '어떻게 살까'가 중심이 된다면 나타날 수 없는 '달콤함'들입니다.

논리적이죠? 또한 여기에 이어서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무례와 혐오와...달콤함'들의 어떤 부분이 의미의 폭력이고 어떤 부분이 무의미의 폭력인지 살펴보세요.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는 것은 역시 '어떻게 살까' 라는 명제에 해당하는 일일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통념적으로 그렇게 하루하루를 온전히 살면 미래의 나는 어떠어떠하게 되어있겠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온전히'를 '열심히'라고만 축소해서 받아들인 이해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교수님이 밝힌 견해는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주고 있다'라는 겁니다. 전제를 파볼까요(천착 舛錯)? 교수님이 여기에 던진 의문들은 상당합니다. '과연 시간은 연속적으로 흐르는가? 아니라면 자아 또한 단일하며 연속적인가?'같은 전제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에 들러붙는 부속적 명제들은 '그렇다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가?' 까지도 가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의 졸업식 축사에서는 'conneting the dots'라고 했죠. 그 전제는 '시간은 연속적으로 흐르며 자아는 단일하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쪽이죠. 저는 스티브 잡스의 축사를 처음에 들었을때는 굉장히 매료되었지만 요 몇년새 그 전제를 이루는 명제들에 불편함을 느껴왔습니다. 그 통념적 전제들에 도전하는 과학자나 철학자들의 수도 상당합니다.

만약에 허준이 교수의 주장처럼 시간이 연속적으로 흐르지 않고 우리의 자아도 단일하지 않다면?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생기죠. 그런데 이런 말은 아주 황당하게 들리죠. 왜냐하면 우리의 직관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논리적 직관을 이겨내고 무모순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 현재 우리의 지식들입니다. 전자가 여기와 저기에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니 직관적으로는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러나 그러한 모델링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핸드폰으로 답글도 달고 합니다. 그런 무모순성의 검토를 일상생활에서도 실천해보는 건 어떨까요?한도 안에서는 여러분은 자유롭게 여러분의 삶의 구조의 아름다움을 추구해보시죠. 자기자신을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잡문

우선, 이 연설을 듣기 전에 '세상이 참 좋아졌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울대의 졸업생 축사를 간편하게 몇번의 터치만으로도 볼 수 있다니.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생각이 먼저드는 요즘이지만 이런 체험을 하면 확실히 예전보다는 살기 좋아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요즈음에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반복적인 삶이 의미 없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고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하였다. 그 와중에 이 연설을 듣게 되었다. 이제막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으로 나갈 이들에게 하는 연설을. 

가끔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먼 훗날의 나도 아마 내가 아닐 수 있겠지요. 교수님은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라 말씀하셨습니다. 삶은 이상합니다. 당장 내일 무슨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매일매일이 쌓이고 쌓여 도달하게 될 '미래의 나'는 과연 '나'라고 말해도 될까요? 오히려 타인이라 불러도 될 만큼 변해있을지도 모릅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떠한 정의도 허락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할일은 무엇일까요? 타인을 나로써 생각하고 먼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나를 타인으로써의 가능성을 열어두어 살아간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이러한 오래된 질문들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 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루하루를 온전히 지금의 나로써 살아가고 그 끝에 서있는 먼 미래의 자신을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삶은 복잡합니다. 여러 무모순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런 무모순을 하루하루 실험하고 경험해보면서 삶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은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이라 말씀하십니다. 서로가 서로가 될 수 있고 먼 미래의 우리도 타인이 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의 구조를 살아가면서 그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요즘들어 글을 다시 쓰고 있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혹시 글을 읽다 말씀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댓글을 남겨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쓰기 >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mind behind linux | Linus Torvalds  (0) 2023.06.07
글과 영화  (0) 2023.05.16

댓글